역사를 간직한 절과 신사 그리고 쇼화의 향기가 남아있는 상가에 들러주십시오.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의 연고지 아사히 상가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는 누구인가?

 

히라가 겐나이(1728~1779)는 에도 시대 중기,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던 인물로, 발명가, 일본 전통 인형 극작가, 난학자(네덜란드 학문), 도예가, 화가, 본초(약학)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特に、특히, 에레키테루(정전기 발생기)의 복원과 복날에 장어로 보양할 것을 세상에 제안하고 뿌리내리게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히라가 겐나이는, 사누키국 사무카와군 시도라(현 카가와현 사누키시 시도)의 시라이시 가문의(白石家)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라이시 모자에몬(白石茂左衛門, 또는 요시후사(良房)), 어머니는 야마시타(山下)씨. 여러 형제가 있었다. 시라이시 가문은 사누키 다카마쓰번의 최하급 무사 신분의 가문으로, 본래는 사나노국 사쿠군의 호족(시나노겐 씨족(信濃源氏), 오오이 씨족(大井氏), 류헤이가 씨족(流平賀氏))이었으나, 『고요군감(甲陽軍鑑)』에 따르면, 전국 시대 텐몬(天文) 5년(서기 1536년) 11월에 히라가 겐지(平賀玄信)의 대에 이르러서는, 카이(甲斐) 지역 영주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의 침공을 받아, 사쿠군(佐久郡) 우미노구치성(海ノ口城)에서 멸족되었다. 후에 히라가 씨족(平賀氏)은 오슈(奥州)의 시로이시(白石)로 옮겨가서, 다테우 씨족(伊達氏)을 섬기는 시로이시로 성을 개명하고, 다시 이요우와지마번(伊予宇和島藩)을 따라, 시고쿠(四国)로 내려와, 사누키(讃岐)로 귀농했다고 한다. 겐나이의 대에 이르러, 성을 시로이시(白石)에서 원래 선조의 성이었던 히라가(平賀)로 다시 개명한다.

겐나이는, 13세부터 번의(藩医)로부터 본초학과 유학을 배운다.
호레키(宝暦) 2년(서기 1752년) 무렵, 1년간 나가사키(長崎)에서 유학을 했으며, 본초학 및 네덜란드어, 의학, 유화 등을 배운다. 유학 후, 번(藩)의 직책을 그만두고, 누이에게 데릴사위를 맞이하게 하고는 상속을 포기한다.。
오사카와 교토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다시 호레키 6년(서기 1756년)에는 에도로 나와 본초학자인 타무라 모토오(田村元雄, 또는 란쓰이(藍水))의 제자로 들어가, 본초학을 배웠으며, 한학을 습득하기 위해 하야시 가문(林家)에 입문하여, 사당에서 기숙한다. 두 번째 나가사키 유학에서는 광산 채굴 및 제련에 관한 기술을 배운다.
호레키 11년(서기 1761년)에는, 이즈(伊豆)에서 광상(鉱床: 유용광물의 집중체)을 발견하고, 산물 중개인 등으로 활동한다. 물산 박람회를 수시로 개최했는데, 이 무렵에는 막부노중(막부의 정무를 총괄하는 직위)인 타누마 오키츠구(田沼意次)에게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호레키 9년(서기 1759년)에는 다카마쓰번(高松藩)의 가신으로 재등용되었으나, 호레키 11년(서기 1761년) 에도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사직한다. 이 때, 「관직 추방형(仕官お構い)을 받아, 추후에는, 막부 관직 등용을 포함, 여타 관직에도 오르지 못하게 된다. 호레키 12년(서기 1762년)에는, 에도의 유시마(湯島)에서 제5회 물산 박람회인 「동도약품회(東都薬品会)를 개최한다. 에도에서 그의 명성이 퍼지면서,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나카가와 쥬안(中川淳庵) 등 당대 유명 학자들과도 교류를 한다.
메이와(明和) 3년(서기 1766년)부터 무사시 카와고에번(武蔵川越藩)의 영주 아키모토 스케토모(秋元凉朝)의 의뢰로, 오쿠지치부(奥秩父)의 카와고에번 지치부오타키(川越藩秩父大滝)(현재의 지치부시 오카키(秩父市大滝)의 나카스가와(中津川)에서 광산 개발을 하여, 석면 등을 발견했다(현재의 닛치츠지치부 광산). 지치부에서는, 숯 굽기 및 아라카와(荒川) 통선 공사 등을 지휘하기도 했다. 현재도, 오쿠지치부의 나카츠 협곡(中津峡) 인근에는, 겐나이가 직접 설계하고 오랫동안 머물렀던 건물이 「겐나이의 거처(源内居) 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안에이(安永) 5년(서기 1776년)에는, 나가사키에서 입수한 에레키테루(정전기 발생기)를 수리하여 복원한다. 안에이 8년(서기 1779년) 여름에는 하시모토 쵸(橋本町)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긴다. 영주 저택의 수리를 맡았을 때, 취한 상태에서 수리 계획서를 도둑맞았다고 착각하여, 목수 십장 2명을 죽인 죄로, 11월 21일에 투옥되어, 같은 해 12월 18일에 파상풍으로 옥사했다. 옥사한 겐나이의 시신을 거둔 이는 광가사(狂歌師: 에도 시대 단가 작곡가)인 베츠즈 토사쿠(平秩東作)라고 알려져 있다.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의 추종자들에 의해 장례식이 치러졌으나, 막부로부터 허가가 나오지 않아, 묘비도 시신도 없는 장례식이 되었다. 다만, 겐나이의 말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상기와 같이 목수인 아키타야큐고로(秋田屋九五郎)를 죽였다거나, 후에 잡히지 않고 도주하여 서류상으로만 사망한 채로, 타누마 오키츠구(田沼意次) 또는 고향인 다카마쓰번(옛 주군이었던 타카마츠 마츠다이라 가문(高松松平家))의 비호 하에서, 천수를 누렸다고도 전해지나,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설은 없다.

 

히라가 겐나이 기념관(平賀源内記念館): 히라가 겐나이가 출생한 카가와현 사누키시에 있는 기념관. 겐나이가 에도로 가기 전까지의 청소년기를 이 곳에서 보냈다.